
지독하게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신년이 되어 꽁꽁 얼었던 눈이 녹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파릇파릇하게 새로운 새싹들이 대지 위로 올라오고, 마침내 온 동네에 벚꽃이 화사하게 만개하던 따스한 봄날, 저는 운명처럼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 블로그를 자주 오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평소에 로맨스 장르를 스스로 찾아보고 즐기는 사람은 절대 아니잖아요? 이번에 보게 된 작품 역시 제가 직접 발굴한 것은 아니고, 인터넷 공간에서 알게 된 친한 지인에게 강력하게 추천을 받아서 반강제로 '찍먹'을 시작하게 된 케이스였습니다.
제가 이토록 로맨스라는 장르를 잘 찾아보지 않고 은근히 피해 다녔던 명확한 이유를 한 가지 이야기하자면, 바로 내용이 너무 '오글거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칼과 마법이 난무하는 판타지 장르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극단적인 내용이라면 "만화니까 그렇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물 기반의 로맨스는 우리의 현실 세계와 배경이 너무나 비슷하니까, 인물들의 대사나 행동이 조금만 유치해져도 손발이 오그라들고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민망한 느낌을 강하게 받아서 끝까지 보기가 참 힘들었거든요. 하지만 이 작품을 던져준 지인의 말로는 "오글거리는 거 전혀 없고, 보고 나면 그냥 가슴이 아주 따뜻해지는 맑은 내용이다"라고 호언장담을 하길래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편견과 신분 차이를 넘어선 두 청춘의 전통 로맨스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은 이름부터 참 예쁜 '향기로운 꽃은 늠름하게 핀다'입니다. 예전에 리뷰했던 '그 비스크 돌은 사랑을 한다'가 코스프레라는 다소 특이하고 독특한 서브컬처 콘셉트를 전면에 내세웠던 것과는 완전히 결이 달랐습니다. 이 작품은 특별한 이능력이나 자극적인 설정 없이, 소위 말하는 주변의 '편견'과 '입장 차이'에서 오는 은근한 신분 차이와 갈등을 주제로 삼은 아주 정석적이고 정통적인 로맨스 콘셉트의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배경 설정부터가 참 묘합니다. 공부 잘하는 수재들과 귀하게 자란 아가씨 우등생들이 모여있다는 소위 명문 아가씨 여학교 '사립 기쿄 학원'에 다니는 여주인공 '와구리 카오루코'와, 우울한 소문과 불량아들이 잔뜩 모여있다는 인근의 악명 높은 꼴통 남학교 '치도리 고교'에 다니는 남주인공 '츠무기 린타로'. 두 학교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붙어 있으면서도 서로를 극도로 싫어하고 깊은 편근에 휩싸여 있습니다. 아가씨 학교는 꼴통 학교를 무뢰한 취급하고, 반대쪽은 아가씨들을 재수 없다고 생각하죠. 작품은 이렇게 절대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양 극단의 입장 차이 때문에 일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갈등과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밀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감정 묘사와 가슴을 울리는 공감의 서사
작품을 보면서 가장 감탄했던 부분은, 각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전개되는 서사에 따른 등장인물들의 가치관, 깊은 생각, 그리고 섬세한 감정 변화들이 화면 연출을 통해 너무나도 잘 드러난다는 점이었습니다. 대사 한 마디, 눈빛 하나에 인물들의 고민이 묵직하게 담겨 있어서, 로맨스를 보며 좀처럼 이입하지 못하던 저조차도 어느 순간 주인공들의 감정에 완벽히 동기화되더라고요.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주변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게 맞을까?' 하며 저도 모르게 모니터 앞에서 같이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무겁고 진지한 고민만 가득한 것은 아닙니다. 명색이 웰메이드 로맨스 장르답게, 서로를 순수하게 향하는 두 남녀의 풋풋한 마음에 관한 수줍은 행동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제 심장도 쿵쾅거리며 같이 가슴이 떨리고 따뜻해지는 명장면들이 정말 셀 수도 없이 많이 쏟아져 나옵니다. 자극적인 사이다나 도파민과는 차원이 다른, 영혼이 치유되는 기분이었죠.
내 심장을 뒤흔든 입체적인 매력의 히로인, 와구리 카오루코
그리고 사실 제가 예전에 블로그에 '매력적인 히로인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글을 장황하게 적었던 진짜 이유가, 바로 이 애니메이션을 여러분께 제대로 소개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이 작품의 여자 주인공인 카오루코는 기본적으로 무척 밝고 긍정적이며 활발한 아이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상대방을 배려하느라 살짝 소심해지는 반전 매력도 가지고 있죠.
재미있는 건 소심하긴 하지만, 정작 중요하고 결단이 필요한 결정적인 순간에는 절대로 도망치지 않고 제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는 '할 때는 확실히 하는' 성격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작품들처럼 오해 때문에 혼자 찡찡대거나 고구마를 양산하는 답답함이 전혀 없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매력적인 캐릭터 조형을 자랑합니다. 가끔 쑥스러워서 소심해질 때는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우면서도, 남주를 향해 세상 무해하게 환하게 지어 보이는 그녀의 눈부신 밝은 미소는 화면 너머 제 심장을 사정없이 뒤흔들기에 너무나도 충분한 치명적인 매력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작사인 CloverWorks 특유의 유려하고 섬세한 고퀄리티 작화가 이 카오루코라는 히로인의 독보적인 비주얼 매력을 한층 더 완벽하게 살려주고 있어서 보는 내내 감탄사만 나왔습니다.
오글거림 없는 완벽한 청춘물, 친구들과의 눈물겨운 우정 서사
결론적으로 이 애니메이션은 제가 그동안 로맨스물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편견을 산산조각 내주었습니다. 로맨스 장르를 멀리하게 만들었던 특유의 손발이 오그라들고 억지스러운 억까 장면들이 정말 눈을 씻고 봐도 없을 정도로 세련되고 깔끔한 서사를 보여줍니다. 고구마와 오글거림이라는 독소 요소를 아주 영리하게 빼버린 셈이죠.
심지어 이 작품이 위대한 이유는 주인공 남녀 커플의 달달한 관계와 서사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주변 친구들의 서사 조차 너무나도 깊이 있고 눈물겹게 좋다는 점에 있습니다. 서로 다른 학교라는 거대한 장벽과 편견 앞에서, 주인공들을 지켜주기 위해 함께 고민하고 연대하는 친구들의 진한 우정 이야기는 스포츠물 못지않은 묵직한 감동과 동기부여를 선사합니다. 자극적이고 잔인한 액션물에 지쳐 가슴을 따뜻하게 정화하고 싶으신 분들이나, 저처럼 로맨스라면 일단 거부감부터 들었던 분들이라도 호불호 없이 인생 명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니 꼭 이번 주말에 정주행해 보시는 것을 강력하게 추천해 드립니다. 여러분의 얼어붙은 마음을 봄눈 녹듯 녹여줄 최고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미 보신 분들이 있다면, 카오루코의 어떤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