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번 글에서 현대 사회의 팍팍한 현실을 반영하며 메이저 장르로 떠오른 '이세계 장르'의 유행과 그에 따른 양산형 문제점들을 아주 신랄하게 파헤쳐 보았었죠. 오늘은 그 분석에 이어서, 뻔하디뻔한 클리셰 홍수 속에서도 자신만의 독보적인 독창성과 신선한 콘셉트로 판도를 뒤흔들었던 메가 히트작 한 편을 제대로 리뷰해 보려고 합니다.
사실 제가 한창 애니메이션을 미친 듯이 많이 보던 고등학생 시기를 떠올려보면, 그때도 저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마음껏 탐험하는 대리만족의 재미와, 고구마 없이 적들을 쓸어버리는 먼치킨 주인공의 시원시원한 액션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판타지 장르 위주로만 골라 찾아보던 때였습니다. 매 분기 쏟아지는 여러 애니메이션을 폭식하듯 챙겨 보면서 참 재미있는 덕질의 삶을 살았었는데요. 오늘은 그 시절 제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던, 이세계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매력을 가진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전생슬)' 1기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아 또 그거? 뻔한 클리셰 타이밍에 찾아온 슬라임이라는 충격
이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실 양산되는 대부분의 이세계 애니메이션의 주된 뼈대와 고정된 내용은 거의 다 비슷비슷합니다. 현실을 지독하게 살던 평범한 주인공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나 트럭 충돌, 혹은 지독한 과로사 등등의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 목숨을 잃고, 의문의 신을 만나 사기적인 능력을 부여받아 판타지 이세계에서 화려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클리셰죠.
그런데 여기서 냉정하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봅시다. 만약 여러분이 진짜로 이세계에 전생할 기회를 얻게 된다면,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으신가요? 십중팔구는 원래 살던 인간의 몸이거나, 혹은 인간과 형태가 아주 비슷하면서도 멋진 엘프나 수인 같은 종족으로 전생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당연히 인간형 종족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슬슬 정형화되어가는 이세계물을 보며 시청자들이 "아, 또 똑같은 그거야?"라고 생각하며 지루해할 타이밍에, 주인공이 하필이면 '슬라임'이 된다는 아주 독특하고 기괴한 콘셉트를 들고 나와 단숨에 시장의 이목을 사로잡았습니다.
지금에야 워낙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대작이다 보니 "슬라임으로 전생한 게 뭐 어때서?"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이 들 수도 있겠으나, 작품이 처음 나왔던 당시의 서브컬처 판으로 기억을 돌려봅시다. 슬라임이 어떤 존재입니까? 판타지 세계관이나 RPG 게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약체의 대명사'이자, 초보 모험가들이 레벨 1때 가장 처음 잡는 동네 잡몹의 대표주자잖아요? 그런 미약한 슬라임으로 전생했다고 하니, 도대체 이 몸을 가지고 이세계에서 뭘 할 수 있단 말이냐? 하는 깊은 의문과 함께 호기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저 또한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과연 슬라임으로 어떤 파란만장한 이세계 생활을 할 수 있을지 한번 두 눈으로 확인해 보자는 생각에 곧바로 1화 시청을 시작했습니다.
황당한 묻지마 칼부림과 내성이 만들어낸 기묘한 전생 연출
애니메이션의 완전 초반 첫 내용은 역시나 다른 이세계물들의 정석적인 도입부와 결을 동일하게 가져갑니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주인공 미카미 사토루가 길거리에서 후배 부부와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게 묻지마 칼부림을 당해 허무하게 찔리게 됩니다.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어가던 주인공은 "추워...", "피가 흘러서 아파..." 같은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데요. 재미있는 건 뇌 내부의 대현자 시스템이 이 고통 섞인 생각들을 일종의 스킬 획득 명령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죽어가며 느끼는 차가움과 고통을 다 느끼기 싫다고 무의식중에 강하게 염원하자, 시스템이 열 내성, 통각 무효 같은 온갖 사기적인 방어 내성 능력을 부여해 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유동적인 능력들을 온전히 담아내기에 가장 적합하고 유연한 형태인 '슬라임'의 몸으로 최종 형태가 결정되어 이세계의 동굴로 워프하게 되죠. 전생한 주인공 '리무루 템페스트'가 새로운 세계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생물학적으로 눈이 아예 없어서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혼자 당황해서 동굴 속을 데굴데굴 구르며 주변 마력 광석을 와구와구 뜯어먹는 장면은 정말 신선하고 재미있는 연출 중 하나였습니다. 시각이 없는 상태를 시청자에게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연출력이 참 돋보였죠.
잡몹에서 세계관 최강자로, '포식자' 능력이 주는 짜릿한 사이다
하지만 최약체 슬라임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볼 게 아니었습니다. 주인공 리무루에게는 상대방을 통째로 삼켜서 대상의 능력과 형태를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복사해 버리는 사기 스킬 '포식자'가 있었으니까요. 동굴 속에서 우연히 만난 거대한 멸망의 인도자 '폭풍룡 베루도라'와 친구가 되고, 그 거대한 드래곤을 통째로 포식해 내부에서 봉인을 분석하며 리무루의 본격적인 먼치킨 행보가 시작됩니다. 동굴 밖으로 나온 리무루는 고블린, 다이어울프, 오거 등 던전에서나 볼 법한 다양한 몬스터 종족들을 차례대로 굴복시키고 이름을 붙여주며 자신의 부하로 흡수해 나갑니다. 이 과정에서 8bit 스튜디오 제작사 고유의 깔끔하고 화려한 마법 연출과 액션씬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데, 먼치킨 장르 특유의 답답함 없는 시원시원한 전개 덕분에 뇌에 도파민이 제대로 충전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약해 빠진 슬라임의 탈을 쓰고 주변의 강적들을 비웃듯이 한방에 참교육하는 사이다 장면들은 전생슬 1기의 놓칠 수 없는 백미입니다.
단순한 모험을 넘어선 몬스터들의 거대한 '왕국 건국기'
이 애니메이션이 가진 다른 양산형 이세계물들과의 가장 결정적이고 차별화된 특징이라고 한다면, 단순히 주인공 혼자 세계를 떠돌며 던전을 깨는 개인의 모험담에 그치지 않고, 거대한 '왕국 건국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입니다. 리무루가 거두어들인 여러 몬스터 세력을 차곡차곡 규합하고 조율하면서, 인간과 마물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자신만의 거대한 연방 국가 '쥬라 템페스트 연방국'을 스스로 건국해 나가는 장엄한 서사가 중심을 이룹니다.
단순히 칼질만 하는 게 아니라 행정을 다스리고, 건물을 짓고, 다른 인간 국가들과 고도의 외교 정치를 펼치는 등 이러한 국가 경영 장르의 애니메이션을 살면서 처음 접해본 고등학생 시절의 저로서는 눈이 새롭게 떠질 정도로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게 본 기억이 뇌리에 깊게 남아있습니다. 뒤로 갈수록 마왕들과의 조우나 오크 디재스터와의 목숨을 건 대결 등 서사의 스케일이 안드로메다로 커지는데 지루할 틈이 전혀 없더라고요. 뇌 빼고 보는 양산형에 지쳐 신선하면서도 묵직한 이세계 판타지를 찾으시는 분들이 있다면, 주말을 올인해 전생슬 1기를 꼭 정주행해 보시길 강력히 추천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리무루 최고의 부하 몬스터는 누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