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블로그의 지난 글들을 보신 분들은 이미 잘 아시겠지만, 저는 판타지 장르를 정말 매우 좋아합니다. 제가 판타지에 사로잡힌 이유는 참 다양한데요. 현실의 뻔한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매력 넘치는 독창적인 세계관, 눈을 즐겁게 만드는 화려한 마법, 그리고 전투를 한층 더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게 만들어주는 다양한 무기술의 향연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주인공을 막아서는 매력 넘치는 몬스터들과 그 험난한 여정 속에서 펼쳐지는 눈물겨운 감동적인 서사까지 더해지니, 판타지는 제 취미 생활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최고의 장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깊게 파헤쳐 볼 주제로 선정한 '이세계 장르'는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거창하게 정의 내릴 것 없이, 이세계 장르란 판타지 장르 중에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완전히 다른 차원이나 세계를 중심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르를 통칭해서 이세계 장르라고 부릅니다.
정통 판타지와 이세계물이 묘하게 섞여버린 어원과 계기
사실 우리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세계적인 명작들로 예시를 들자면,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전 세계를 휩쓴 소설이자 미드로 잘 알려진 얼음과 불의 노래(왕좌의 게임) 등이 완벽한 이세계의 예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지구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대륙과 역사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니까요. 물론 현실에서는 이러한 묵직한 작품들을 이세계물이라기보다는 그냥 '정통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통칭해서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서브컬처를 즐기는 사람들은 유독 '이세계 장르'라는 독특한 명칭을 따로 떼어내어 부르게 되었을까요? 이것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바로 일본 서브컬처 판에서 쏟아져 나온 주인공의 '이세계 전생' 혹은 '이세계 전이'를 그리는 작품들의 유행에서부터 이어져 오게 됩니다. 보통 이러한 일본식 작품들은 주인공이 원래 살던 현대 사회를 떠나 칼과 마법이 존재하는 중세 서양풍 판타지 세계에 전생하거나 전이하는 클리셰를 취하고 있었거든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대중들 사이에서는 '중세 판타지 세계가 배경으로 나오면 무조건 이세계 장르다'라는 오해가 자연스럽게 굳어지며 지금의 장르명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2010년대 대히트작의 등장, 양산형 시대의 서막
이세계 장르가 서브컬처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메이저 장르로 치고 올라오며 대유행을 타게 된 시점은 2010년대에 들어서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웹소설 플랫폼인 '소설가가 되자' 등에서 인기를 끌던 작품들이 대거 애니메이션화되면서 판도가 완전히 뒤집힌 것이죠.
가장 대표적으로 이세계 코미디의 한 획을 그은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코노스바)'을 시작으로, 제가 예전 글에서도 아주 침이 마르게 칭찬했던 국가 건설물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전생슬)', 그리고 처절한 루프물로 가슴을 쥐어짜게 만든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리제로)' 등의 메가 히트 작품들이 연달아 대히트를 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들이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자, 애니메이션 업계와 자본의 관심도 온통 이세계 장르에 쏠리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셀 수도 없이 많은 이세계 장르들이 우후죽순 양산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인의 팍팍한 현실을 반영한 서글픈 대리만족의 힘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세계 장르는 시장이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양산이 될 만큼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요? 곰곰이 뇌피셜을 굴려보면, 사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팍팍한 '현실상'을 고스란히 반영한 씁쓸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야근과 학업, 인간관계 등 현실의 무거운 스트레스에 치여 사는 현대인들이 장르 속에서 위로를 찾는 것이죠.
작품 속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아주 허무하게 고통받다가 어떤 계기, 예를 들면 길을 가다 무모하게 뛰어드는 '트럭에 치이거나' 지독한 '과로사'를 당하는 등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그 직후 치트급 능력이나 전생의 기억을 온전히 가진 채 이세계로 전생하여, 완전히 새로운 황금빛 삶을 사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죠. 답답한 고구마 현실에 지친 시청자들은 이런 사이다 전개를 보며 짜릿한 대리만족과 강력한 도파민을 수혈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도 저 세계에 가면 저렇게 대접받고 멋지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일탈의 심리를 완벽하게 파고든 셈입니다.
클리셰 범벅과 불성실한 작화, 장르 자체의 몰락과 반감
하지만 뭐든지 과하면 독이 된다고 했던가요. 돈이 된다니까 무작정 찍어내는 수준으로 양산되는 이세계물들은 시간이 갈수록 대중들에게 엄청난 피로감과 깊은 반감을 심어주게 되었습니다. 시장이 완전히 포화 상태에 이르자 각 작품 고유의 신선한 특색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너도나도 어디서 본 듯한 설정만 짜깁기한 '클리셰 범벅'의 쓰레기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인물 간의 깊이 있는 감정 교류나 탄탄한 서사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은 채, 단순히 장르의 반짝 인기에 무작정 편승하여 주인공의 사기 능력 자랑만 하다가 끝나는 공허한 양산형들이 판을 쳤죠. 심지어 이를 기반으로 제작되는 애니메이션들 또한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작화를 전혀 신경 쓰지 않거나, 연출에 정성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날림 퀄리티의 작품들이 많아지면서 장르 자체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커뮤니티에서 '이세계'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일단 거르고 보는, 장르 자체를 심하게 기피하는 부작용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세계를 완전히 놓지 못하는 이유
결국 현대의 이세계 장르는 사이다 전개의 극치라는 달콤한 장점과, 알맹이 없는 양산형 홍수라는 치명적인 단점을 동시에 안고 있는 서브컬처계의 거대한 양날의 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장르가 아무리 비판을 받고 이미지가 깎여 나갔을지언정, 현실의 피로를 한 방에 날려주는 시원시원한 대리만족의 힘만큼은 절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건 장르 자체가 아니라, 그 장르를 다루는 제작사와 작가의 진심 어린 서사와 정성 어린 연출일 것입니다. 앞으로는 뻔한 클리셰 범벅의 양산형 마인드에서 벗어나, 초창기 코노스바나 리제로가 우리에게 주었던 신선한 충격과 탄탄한 감동을 다시금 느끼게 해 줄 웰메이드 이세계 명작들이 많이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인생 최고의 이세계 애니메이션은 무엇인가요?